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문단 편집) == 평가 ==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 같으니라고! 독재자 한 명을 타도한다고 독재정치와 독재국가가 무너진단 말인가? 그로 인한 혼란이 오지 않을 것이란 말인가? >-[[키케로]],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주의파 의원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는데 성공했음에도 왜 카이사르의 지지가 사라지지 않는지 원망한 것에 대해 내린 평가[* 히틀러와 몇몇 수뇌부만 제거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검은 오케스트라의 생각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독일군 병사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노르망디]]에서 공군의 지원 없이 연합군 군대와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그들에게는 고위 지휘 체계가 무질서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또 7월 20일에는 여러 장군들이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함으로써 독일군이 위기를 맞았다. 내가 보기에 그 장군들은 옳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을 '축출'하는 것은 장군들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정치인들 스스로 해내는 것이 최선이다.[* 결국 히틀러 청산은 연합국의 철저한 반나치화 교육에도 이뤄지지 않다가 서독에서 1970년대부터 새로 집권한 세대가 히틀러의 반인륜 범죄를 제대로 공개 및 단죄하기로 합의하면서부터 제대로 이뤄지기 시작한다. 그것도 반나치화 교육을 받고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권위에 따르다가 국가가 초토화된 이유에 의문을 갖던 세대가 결국 전세대의 행적을 다시 파다가 히틀러가 악의 근원이었다는 걸 깨달으면서 시작된 것.]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회고록 <전쟁의 역사>, 1968년 종전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한스 슈파이델]]을 위시한 암살자 그룹 멤버들의 회고록이 먼저 발간되었다. 이들은 히틀러에 의해 목숨을 잃은 옛 동료들을 추모하며 자신들의 높은 이상에 동참하지 않았던 독일군 장교들을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모조리 동원하며 매도했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마무리되고 국방군의 유명 지휘관들이 석방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프로이센 장교들은 "군인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비단 독일군 뿐 아니라 위의 몽고메리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무려 암살 미수 사건 24년 후에 출판된 회고록임에도) [[제1차 세계대전]]부터 참전한 연합군, 독일군 고위 장성들의 보편적인 사상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1950년대에 발표된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위의 몽고메리의 글과 비슷한 내용으로 암살자들에 대한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암살자들의 높은 이상에는 동의하지만 나치 친위대와의 유혈 투쟁으로 내전이 발생했을 것이고 외교적으로도 아무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연합군은 '무조건 항복' 이외에 어떤 협상도 불가한 입장이었기 때문."~~사실 이 평가조차 제일 잘 내준 평가이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 아울러 다른 장성들에 대한 암살자 그룹들의 비난에 대하여 비방에 가까운 사실 왜곡이라며 이를 반박했다. 독일군의 명장 [[구데리안]]과 [[만슈타인]], [[파울 하우서]] 등은 '그놈들은 그냥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니까 어떻게든 자기 살길 찾으려고 일을 벌인 기회주의자들임에 불과하며 오늘날 가담자들이 받는 대우는 놈들이 아닌 전선에서 싸운 장병들이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암살미수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도 이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으며 [[조지 S. 패튼]]은 '멍청한 놈들'이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그렇다면 젊은 장교들과 일선의 장병들은 어떠했을까? 나치당 관헌들은 전투 부대원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고 이들에 대한 불만이 치솟으며 종전 후에 이러한 현실을 바꾸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음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 소식이 전해졌을 때 장병들은 매우 분개했으며 암살자 그룹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 그들의 임무를 다했다. 국내에도 발간된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에는 '1945년 이후, 저항 조직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들은 진정한 이상주의자들의 특징인 겸손함을 잃어버렸다. 유감스럽게도 1944년 7월 20일 사건으로 인해 처형당했던 사람들은 독일 국민에게 어떤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저항 조직원들의 죽음이 일선의 장병들의 죽음보다 덜 존귀하지도, 더 존귀하지도 않다.'라고 평가한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왜 고위 장교들을 비롯한 [[독일 국방군|국방군]]의 젊은 하급장교들을 비롯한 일선의 장병들의 인식이 이토록 부정적일까?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당시 독일군 내부에는 '''이 전쟁은 이미 졌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지고 암살자 그룹들은 작전을 짜나아갔다. 즉 서부 전선 방어군 원수 [[에르빈 롬멜]]과 [[귄터 폰 클루게]]그리고 [[구데리안]]을 비롯한 주요 OKH 즉 국방군 육군 총참모부에서 양면에서 압박을 가해오는 소련군과 연합군을 막기 힘들며 협상을 해서 '''전쟁으로 국토가 망해버리기 전에 휴전을 하자'''라는 아이디어를 기존의 히틀러 반대 장교들이 발전시켜서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에서 명시된 최고위 장교들이 생각한 협상이란 '''어느 정도 [[프랑스]]에서 격전으로 연합군이 힘을 빼고 있는것을 이용해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설득하여 우선 연합군과 휴전을 하고! 서부전선의 전 독일군을 동부전선으로 투입하여 소련군의 공세로 분쇄된 독일 동부군을 재건하여 전선을 안정시킨후 휴전을 한다'''였다. 즉 최고위 장교들은 히틀러 없는 휴전이 아니라, 히틀러를 중심으로한 나치 독일의 휴전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안네의 일기]]에서 지적된 내용처럼 한숨을 돌린후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히틀러에게 휴전을 할 것을 조르던 고위장교들이 당연히 암살자 그룹의 생각에 동의할 리가 없었다. 암살 미수사건 이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슈타우펜베르크]]의 사촌[* [[독일 공군(나치 독일)|루프트바페]] 연락장교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1944년 8월5일 총살]에 대해 실시된 [[게슈타포]]의 심문기록이 전후 연합군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7월 3일 [[귄터 폰 클루게|클루게]]와 [[에르빈 롬멜|롬멜]]을 만난 그는 이들에게 서부전선에서 서둘러 휴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를 총통이 끝까지 반려할 경우 총통에 대한 일련의 최종적인 제재나 행동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것은 바탕으로 서부전선 고위 장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한 제재나 행동은 결코 '''히틀러 제거'''를 의미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의 제재나 행동은 군사적 부분이었다는 것과 정치적 부분을 비롯한 타 부분에서의 권력을 박탈할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는것이 모든 연구의 동의사항이다. 동부전선 고위장교들의 경우 서부전선보다 더 뼈저리게 전쟁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히틀러를 위시로 한 제국의 휴전만 지지했을 뿐 총통 없는 독일 공화국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일선의 독일군 장병들과 하급장교들 그리고 심지어 독일 국민들에게도 공통적인 사항이었는데 이들 모두 전쟁이 이 꼬라지가 난것에 대해 분명 총통에 대한 의심과 불만은 있었지만 오직 '''군사적 역량'''에 대한 것이었지 정치적 역량에 대한 것은 없었다. 아니 심지어 있었지만 앞서 [[버나드 몽고메리|몽고메리]]가 지적한 것처럼 독일군 전장병들과 장교들 그리고 국민들은 그걸 정치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았지 군인들이 쿠데타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았다. 또한 [[프로이센]] 제국의 위대한 [[프리드리히 대제]] 이래 [[게르만족|독일 민족]]에게 있어서 군인으로서 서약한 것을 목숨으로 지킬 것은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뇌리 속에 강렬히 박혀있었다. 즉 전쟁에서 밀려 매일같이 연합군으로 부터 열심히 얻어맞고 있었지만 전쟁전 총통의 정치적 역량, 그리고 무엇보다 저 유명한 선서인 국방군 서약에 따라 죽음으로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게슈타포]]를 위시로한 [[슈츠슈타펠|친위대]]의 악행에도 독일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총통의 정치적 역량과 독일 민족을 이끄는 리더십'''을 부정하고 뒤집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무엇보다 전쟁 발발 후 폴란드, 프랑스, 영국 본토와 대서양, 발칸 반도 그리고 지옥같은 소련 영토에서 앞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다하고 전사한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장병들과 장교들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독일인들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독일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암살 행위는 앞서 참혹하게 전장에서 전사한 전우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안위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개시했다고 보는것도 무리가 아니었으며 실제로 이 암살 미수작전에 참여했던 장교들 중에는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장교들도 있었다. 아인자츠그루펜 장교들은 그저 총통에 대한 높은 충성심과 잔악상을 기준으로 뽑힌 사병들과 달리 SS 나치 친위대 중에서도 [[히틀러 유겐트]], [[나치 돌격대|갈색 셔츠 돌격대]]나 청년 돌격대, [[나치당]] 입당 절차를 거친후 그중에서도 [[나치즘|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충성과 이해도가 높은 이들로만 구성된 [[게슈타포]]와 제국 보안부 그리고 SD 방첩대에서 잔악성을 인정받은 이들로 구성된 장교들이었다. 독일 국민들에게는 이들이 안위를 위해 암살을 시도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히틀러에게 충성을 하던 작자들이었다. 이들이 독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전쟁으로 초토화될 독일을 염려하여 암살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는 게 당시 자연스러웠을까? 독일 국방군의 하급장교들과 장병들이 서부와 동부에서 각각 히틀러에게 저항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그럴 일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됐다. 그만큼 독일군과 국민들은 히틀러와 나치당 그리고 나치 수뇌부의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히틀러를 [[역대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1932년 이래 전폭적으로 지지]]해온 이유, 즉 '''[[지도자 원리|독일 국민들을 이끌어 나갈 역량을 갖춘 유일한 지도자]]'''라는 것을 부정할 만큼은 아니었고 부정할 생각조차 없었다. 즉 정리하자면 전쟁에 대해선 독일군 장병들과 국민들 그리고 장교들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을 멈추기 위해 총통을 죽여야 한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히틀러와 나치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조차 히틀러와 [[하인리히 힘러|히믈러]]. [[괴벨스]]를 제거한다고 나치 독일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전국민이 단결해서 국가적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판에 암살자들이 국가 혼란을 가중시킬 뻔했다는 것이다. 전후 연합군이 독일 국민들에게 탈나치화 교육과 노역을 시켰던것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연합군은 독일 국민들에게 [[참교육|폐허가 된 자신들의 도시를 직접 수리하도록 노역]]하면서 이 참혹한 광경이 독일군에 의해 전 유럽에서 이루어졌다는것을 분명히 상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탈나치화 영상물, 즉 여러 독일군 종군기자들이 찍은 얼마 안 되는 국방군과 친위대에 의해 이루어진 학살 장면, 그리고 연합군이 해방시킨 [[다하우#s-2|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참혹함을 보여주며 나치의 전쟁범죄를 각인시키고 나서야 탈나치화를 이룰수 있었다.[* [[홀로코스트]]와 포로 및 [[슬라브족|슬라브 민족]] 대량학살을 독일인들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조용히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나치 수용소와 그곳의 참혹함을 분명 알고 있었다. 다만 정확한 진행 상황이나 죽음의 행진, 죽음의 열차, 가스처형같은 '''상상도 못할 인간 문명을 배신한 방법으로 살해한 것''', 아무것도 안한 사람들을 그저 슬라브인이라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인 것, 심지어 자국 [[T4 작전|독일인들중 장애인들까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의 주도 그리고 국방군 고위장교들의 협력또는 묵인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잘 모르고 있었다. 연합국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야 독일인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1960년대까지만 해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인식은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 냉전으로 독일을 재건할 필요가 있던 서방과 소련이 모두 반인륜 범죄를 제외하면 나치 만행을 적당히 덮어버렸기 때문. 유대인 학살 등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만 잘못을 인정했을 뿐 나치의 통치 방향 자체는 나쁘지 않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며 히틀러가 전쟁만 패하지 않고 유대인 및 기타 점령지 주민 학살만 안 했으면 영웅이 됐을 거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다가 68혁명 이후 전쟁중에 숱하게 죽어나가고 전후에도 젊은 시절을 경제재건에 바쳐야 했던 다음 세대가 사회 주류가 되면서 제대로 파고들게 됐고, 그때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탈나치화가 이뤄진 것이다.] 게다가 가담자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저서에서 주장하거나 언론에서 보도했던 것처럼 인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가담자 중 아르투어 네베 경찰중장은 무려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 출신으로 유태인 절멸수용소라는 아이디어의 최초 입안자였다. 애초에 설령 쿠데타가 성공해서 연합군과 협상을 할려고 시도한들, 연합군은 [[하인리히 힘러]]를 체포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그 자신의 착각처럼 협상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 즉시 체포해서 전범 재판에 넘겨서 사형을 내렸을 인물이었다. 이렇듯 정작 독일군은 물론 적국에서조차 평가가 분분했다가 갑자기 이들이 추앙받게 된 것은 [[서독]]정부가 사실 독일에도 히틀러의 압제에 저항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란 비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독일 내 좌파 언론에서 국방군의 인종 학살 연루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면 반대쪽에서 '암살자 그룹 영웅화'로 무마하려는 모습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독일 국방군]]이 제거되면서 어떤 전통을 계승해야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암살자 그룹을 영웅화시킨 면도 있다. 암살자들이 요즘처럼 확실하게 애국자로 대우받게 된 것은 [[68혁명]] 이후의 일로 서독 정부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슈타우펜베르크]]는 반나치운동의 대표적 인물로서 존경받게 되었고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하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중요 5인의 기념비가 베를린의 [[독일 연방군|국방성]] 자리에 세워졌고, 예비군 사령부가 있던 거리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개명되어 애국자들을 기리고 있다. 다만 윗문단에서 언급한 '''저항인물 강조'''에서 아르투어네베 중장같은 기회주의적 성격으로 참여한 장교들이 분명 존재했기에 2000년 이후, 즉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동독과 서독이 보유한 나치에 대한 기록 그리고 연합국으로 부터 받은 나치에 대한 기록을 모아 많은 검증된 역사학자들의 토론을 통해 앞서 제기된 비판사항을 보완하기 위해[* [[에르빈 롬멜]]을 비롯한 여러 국방군 장교들에 대한 재평가 즉 어쨌든 나치의 부역자다라고 결론내려진 것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노력했으며 아르투어 네베 중장같은 케이스를 가진 장교들은 기존의 서독 정부가 가지고 있든 암살 작전 애국자 목록에서 삭제를 하고 나치 부역자이자 전범으로 명시하였다. 현 독일 정부는 '''[[나치당]]과 [[히틀러]] 그리고 [[나치즘|국가사회주의]] 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슈타우펜베르크와 중요 5인, 그리고 선별적으로 반나치 반히틀러 반전 사상이 있다는것이 확인된 인물들에 한해서만''' 영웅으로 추앙 중이다. 매년 독일 연방군 입대식이 슈타우펜베르크 거리에서 이루어지며 그를 비롯한 나치에 저항하고자 했던 장교들의 정신을 이어받을 것을 선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 7월 20일이 되면 추모식도 매년 열고 있다. >큰 뉴스! 히틀러 암살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유대인]] [[공산주의자]]도, [[영국]]의 [[자본가]]도 아닌 훌륭한 독일의 장군으로, 그것도 아주 젊은 [[백작#s-2.3]]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와 화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히틀러와 함께 있던 수 명의 장군과 장교가 죽거나 다치고 주범은 사살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전쟁에 지쳐 히틀러를 없애려는 장군이나 장교가 많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제거하면 군인 출신 독재자를 옹립하고, 연합군과 강화를 맺은 다음 재군비를 해서 20년 쯤 지나면 다시 전쟁을 시작할 속셈이겠죠.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로 히틀러의 죽음이 늦춰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적의 독일군들끼리 서로를 죽여준다면 연합군측은 훨씬 유리하고 편하겠죠. 그렇게 하면 소련군과 영국군이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겪는 고생이 가벼워질 테고, 그만큼 빨리 파괴된 자기 나라의 도시 부흥에 착수할 수 있을텐데요. > > -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1944년 7월 24일 당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네의 일기]]에서도 그녀는 이 사건을 은신처에서 듣고 일기로 썼는데 암살 계획에 대해서 비슷하게 다음에 다시 전쟁이나 일으키겠지라는 식으로 적혀있다.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암살범들은 유태인을 마찬가지로 미워하던 자들이라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는지 자못 냉소적으로 씹고 있다. 물론 암살 주도자들은 유태인들을 미워하는 자들은 아니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유태인을 학살하고 다닌 [[아인자츠그루펜]] 장교들이 함께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10대 [[청소년]]이 스스로 논평을 내렸다기보단 그런 인식이 이미 대중 사이에 짙었다고 보는게 좀 더 타당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